아시아는 세계다, 왕후이 - ‘트랜스시스테믹 사회(trans-systemic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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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는 세계다, 왕후이  [서평] 황홀한 아시아에 대한 두려움 조 명 기 현대 아시아의 역사적 비극은 시선을 제어하는 사유방 식을 서구에 의탁함으로써 발생했다는 자기반성을 겸하고 있다. 1930~ 1940년대 중국의 민족 형식 논쟁에 대한 글을 연이어 배치한 이유는 서구 적 시선의 폭력성을 증명하는 역사적, 혹은 현재의 사례를 아시아적 질서 를 위한 대안 모색으로 이어가기 위한 논리적 징검다리가 필요해서일 것 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왕후이는, 이론적으로 그리 엄밀한 개념이 아니라 고 하면서도 역사적 뿌리가 풍성한 ‘트랜스시스템사회trans-systemic society’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트랜스시스템사회를 “서로 다른 문명․종교․종족․집단 및 기 타 시스템을 포함하는 인간 공동체이거나 사회 연결망”(409쪽)으로 설 명하면서 “각 시스템이 상호 침투하고 사회 연결망을 구성하는 특징을 더욱 강조한다.”(410쪽)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진행되는 문 화ㆍ정치 등 각종 차원의 트랜스내셔널, 트랜스로컬, 트랜스에스닉 활동 은 결국 경제활동의 역량으로 포섭되고 있다고 지적하는 한편, 트랜스시 스템사회는 이와는 정반대로 “서로 다른 문화, 종족집단, 지역이 교류ㆍ 전파ㆍ병존하면서 서로 연관된 사회 형태와 문화 형태를 형성한다”(9쪽) 고 주장함으로써 대립관계를 분명히 드러낸다.   ... ----------------------------------------------------------------------------- 아시아는 세계다/왕후이 지음·송인재 옮김/480쪽·2만5000원·글항아리 중국의 유명 사상가인 저자가 ‘중국과 중국의 근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 아래 1996년부터 2010년 사이에 발표한 여섯 편의 논문을 엮었다. 그는 ‘트랜스시스테믹 사회(trans-systemic society)’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오리엔탈리즘을 타파하려 한다. 이 개념은 조공체...

장타이옌(章太炎), 장빙린(章炳麟, 1868년~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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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빙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빙린 장빙린 (章炳麟,  1868년 ~ 1936년 )은  중국   청 말  민국  초기(民國初期)의 학자이자 혁명가이다.  저장 성  여항현(余抗縣) 출신이다. 자는 매숙(枚叔). 호는 태염(太炎)이다. 생애 [ 편집 ] 소년 시절에 일찍이 배만의식(排滿意識)에 눈떴다고 한다. 청년 시대에 유월(兪越)에게 사사하여  고증학 을 수학하고, 《좌씨전(左氏傳)》을 연구한 뒤에  캉유웨이 · 량치차오  등의 개혁운동에 참가하였으나 그들의  공양학파 (公羊學派)와는 학문상의 견해를 달리하여 곧 그들과 결별하였다.  무술정변  후 한때  일본 에 망명하여 개혁파를 떠난 채 배만운동(排滿運動)을 결의하였다. 〈구서〉에서 강렬한 배만사상을 표명한 데 이어 〈박강유위론혁명서(駁康有爲論革命書)〉와, 추용(鄒容)의 저서인 《혁명군(革命軍)》의 서문에서 청조를 매도하여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는 불전(佛典)을 연구했다. 또한 저장(浙江) 계통의 혁명단체인 광복회(光復會)의 결성에 관여하였다. 출옥 후  도쿄 에 가서 중국 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의 기관지인 <민보(民報)>의 주필이 되어 민족혁명을 맹렬히 고취하였다.  신해혁명  후에는  위안스카이 (袁世凱)의 반동정치에 반대하였고,  쑨원 (孫文) 등과 행동을 함께 하였다. 뒤에는 정계를 떠나 국학(國學)의 연구와 유지에 전념하여 민국의 학문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 출처 필요 ] 사상 [ 편집 ] 혁명가로서의 그의 특색은 화이사상(華夷思想)에 입각한 종족혁명주의(種族革命主義)에 있고, 쑨원 등의 서구적·근대적 혁명이론을 승인하지 않았다. 학자로서는 고증학의 정통을 자부하였고, 특히 소학(小學) (현학·훈설(訓說)·音韻學)에 상세하며, 음운학의 권...

1920년대를 전후로 한 동서문명 논쟁 -두아천(杜亞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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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hjh3775/60124376082 http://blog.naver.com/hjh3775/60124376082 1920년대를 전후로 한 동서문명 논쟁     근대의 동아시아 아래 글은 한세대 강명희 ( 姜明喜 )  교수님의  「 5 ∙ 4  시기 중국의  ‘ 제 3  신문명 ’  건설 탐색 」의 일부를  읽고 정리하고 느낌을 더한 것입니다 . 신문화운동 시기 호적 ( 胡適 ) 이  ‘’ 재조 ( 再造 ) 문명 ( 文明 )’ 을 꿈꾸며 서양문화를 도입하여 활력을 상실한 중국문명을 치유하고자 했듯이 ,  이대조 ( 李大 钊 ) 도  ‘ 제 3 의 문명 ’  건설을 제기하였지만 ,  그는 동서문명의 특성을 겸비하고 사회주의혁명을 성공시킨 러시아를 그 모델로 상정하였다 . 1919 년  9 월 연구계 ( 硏究系 ) 에 의해 창간된  『 해방과 개조 』 에 게재한 논설  「제 3 종문명 」에서 장동손은 습관과 미신의 제 1 종 문명과 자유와 경쟁의 개인주의와 국가주의 제 2 종문명에 이은 제 3 종문명을 호조와 협동의 사회주의 세계주의로 특징지웠다 . 신해혁명 후 황제제도 붕괴에 따른 전통사회 측면에 동요가 시작되었다해도 , 2 천년 동안 국시 ( 國是 ) 였던 성인의 가르침에 대한 『신청년』그룹의 도전 ,  즉 ’ 打倒孔家店 ’ 을 제기한  5 ∙ 4 신문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는 중체서용 ( 中體西用 ) 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비로소 진정한 탈피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신청년그룹의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문화급진주의 신문화운동은 국수파뿐만 아니라 학형파 ( 學衡派 )  등 문화보수주의자들의 반격을 불러일으켜 신구문화 논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  전통에 대한 입장의 차이와 표리를 이루는 것이 서양에 대한 ...

한국·이슬람, 1천2백년 교류사 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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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105/nd2001050340.html 인류 문명은 인류 공동의 창조물이다. 서구인들이 말하는 문명충돌이란 문명발달의 長流大河 속에 있는 작은 소용돌이에 불과하다. 문명은 끝없이 교류한다. 한반도와 무슬림은 3국 시대에 만났고, 고려시대에도 만났으며 조선시대에 교류했다.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필연으로, 여기에는 문명교류의 온당한 원리와 귀중한 경험이 온축(蘊蓄)돼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 시대에 걸맞은 새롭고 진취적인 문명관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정수일 < 전 단국대 교수 >          지난해 늦은 가을 유서 깊은 경주를 찾았다. 2000년 세계문화엑스포장에서 계림로 단검이나 토용 같은 서역계 유물들을 두루 돌아보고, 시 남쪽 외동면에 자리한 괘릉(掛陵)에 들렀다. 외호물로(外護物)서의 심목고비(深目高鼻)한 무인석상은 여전히 무언 중 유언의 증인으로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내친 김에 울산 처용암도 둘러봤다. 이제 처용가 비문에도 세월의 티가 아련히 끼기 시작했다. 늘 마음에 두고 있던 곳들이라서 몇 년 만에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일전에는 서울 한남동 이슬람사원(마스짇)에 찾아가 주마(금요일예배)를 지켜보기도 했다. 역시 몇 년 만의 일이다. 낯익은 한국 무슬림은 몇 명 안 되고 대부분이 낯선 외국인 무슬림들이다. 한국 이맘님(‘이맘’이란 예배인도자란 뜻)의 인도에 따라 거행되는 예배의식은 자못 진지했다. 그런가 하면 며칠 전에는 북한산 등산길에서 오래간만에 몇몇 지인과 대작(對酌)하면서 소주의 내력을 더듬어보기도 했고, 이 글을 준비하느라 ‘고려사’에 실린 ‘쌍화점’ 가사를 다시 음미하기도 했다.   필연적인 두 문명의 만남    이 모든 것에 대한 회상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