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벌초와 가라데의 기원
삼벌초와 가라데의 기원
http://www.taekwon.net/mks/history/1150
일본의 대표적인 도수무예는 유도이다. 하지만 오키나와에서 유래한 가라테 역시 20세기에 일본의 대표무예로 성장하고 있다. 오키나와에서 연원한 무술인 가라테는 고려시대의 한국 무예가 오키나와에 전래되어, 당시에는 일본과는 다른 독립왕국이었던 유구국(琉球國)의 토착무예로 발전한 무예이다. 그 상세한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가라테가 한국의 무예에서 기원하였다는 점은 “가라테”라는 이름에서도 확인된다. “가라테”라는 명칭은 한자로 “당수(唐手)” 또는 “공수(空手)”라고 쓴다. 하지만 당수(唐手)와 공수(空手) 중에서 가라테의 원래 글자는 ‘공수(空手)’가 아닌 ‘당수(唐手)’이다. 2차 대전 직전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가라테”를 표시하는 한자어 “당수(唐手)”에 ‘당(唐)’자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여 발음이 같은 ‘공(空)’자로 바꾸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맨손무예인 가라테가 발생한 곳으로 알려진 오키나와[沖縄, Okinawa]는 일본열도의 남쪽에 있는 40개의 유인도와 수많은 무인도로 이루어진 섬나라였다. 오키나와를 “유구”왕국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은 중국이나 조선(朝鮮) 등의 외국에서 오키나와를 부르는 명칭이었을 뿐이며, 오키나와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리는 고유 명칭은 “오키나와”나 “우치나”였다(김산호, 2011).
오키나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일본, 중국, 한국과 오키나와의 역사․문화적 관계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나 고고학적 유물과 같은 자료들은 적지 않은데 대체로 오키나와는 한국과의 역사․문화적 교류가 가장 컸다. 이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 중의 하나는 ‘만국진량의 종(萬國津梁之鐘)’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이다(김산호, 2011).
“가라테(唐手)”의 한자 이름 때문에 이 무술이 당(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이런 생각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첫째, 그 이름에 들어있는 “당(唐)”자의 당나라가 가라테의 전신인 오키나와 데가 발생했다고 추정되는 시기와 너무나 큰 시간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 특히 조선 시대 이후 한국과 일본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문물들에 대해서 ‘당’(唐)자를 붙이는 사례는 상당히 드문 일이다.
셋째, 가라테의 ‘가라(唐)’자는 당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나라(한국)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넷째, 한국에서 유래된 문화에 ‘당(唐)’자를 붙이는 관례는 일본 조정이 가라(韓國)을 극도로 혐오하기 시작하여 생겨났다(이창후, 2003).
한편 가라테가 한국에서 전래된 무예라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다양한 오키나와의 민속문화들이 모두 한국의 민속문화와 폭넓은 일치를 보여준다. 오키나와에서는 고추를 고려초(高麗草)라 하고, 널뛰기․석전(石戰)․씨름 등을 고려희(高麗戱)라 한다. 청나라의 주황(周煌)이 쓴 ≪유구국기략(琉球國記略)≫에 유구의 여인들이 널빤지 위에서 판무(板舞)를 한다고 했으니, 이는 조선 여자들의 도판희(널뛰기)와 같다. 여기서 중국인들이 널뛰기를 이처럼 어렵게 표현하는 이유는 여인들의 널뛰기가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놀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의 소싸움 진행 방식도 우리와 똑같고 응원할 때 쓰는 기의 깃봉에 태극무늬를 그려 넣는 것도 똑같다. 오키나와의 씨름 방식도 한국처럼 샅바를 잡고 한다(김산호, 2011). 오키나와의 돼지고기 먹는 방법은 한국의 제주도와 똑같다. 제주도의 전통적인 조리법엔 돼지고기를 굽는 경우가 드물고 거의 삶아서 먹는데, 오키나와도 이 방법을 따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돼지를 사육하는 방법도 뒷간과 돼지우리를 연결해 놓은 소위 제주도 똥돼지 사육법과 똑같다(김산호, 2011)
둘째로 오키나와의 언어도 한국어와 비슷하다. 오키나와에서는 한국어 아버지를 ‘아부지’, 어머니를 ‘암마’, 할머니는 ‘할메’ 혹은 ‘하아메’라고 부른다. 또 사탕은 ‘사아따아’, 대개는 ‘데에게에’, 맛있다는 ‘마아세에따', 오이는 ’우이‘, 동지는 ’도웅지‘, 심지어 북한식 욕설인 ’쌍간나‘는 ’산가나‘라고 하며(김산호, 2011), 또한 ‘왕’을 ‘사또’, ‘오이’를 ‘우이’라 하며, ‘동지(冬至)’를 일본어의 ‘도오지’나 중국어의 ‘똥쯔’보다는 우리말에 가까운 ‘도웅지’라고 발음하고, 무게의 단위인 관(貫)을 ‘관’이라 하여 일본어 ‘깐’과는 다르지만 우리말과는 유사한 등, 끝이 없이 많은 예가 있다(허인욱, 2005).
그렇다면 한반도의 무예가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오키나와에 전파되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고려 말에 원나라의 침입에 무너진 고려에 반대하여 원종 11년(1270) 6월 초하루에 장군 배중손, 야별초 지유 노영희 등의 지휘로 삼별초군이 몽골에 항거해 봉기하였다. 처음에 삼별초는 강화도에 지배권을 확보하고 반몽(反蒙) 정부를 세웠으나, 1271년 몽골군 총사령관 흔도(忻都)와 김방경이 이끄는 여몽 연합군에 밀려서 강화도를 버리고 진도로 물러났고, 뒤이어 제주도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도 절대적인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키나와로 피신하였다(김산호, 2011). 김산호(2011)에 따르면 오키나와에서 삼별초는 방어를 위한 군성인 구스쿠를 세우고 오키나와 왕국을 건설한다(김산호, 2011). 당시의 슈리성(首里城)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1982년 대량의 고려기와가 출토됨으로써 이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김용만․김용범, 2011).
더 이상 몽골과 고려관군의 위협이 없게 되자, 삼별초 지도부는 더 이상 집단적으로 뭉쳐서 섬을 방어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게 되고 섬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서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각 구수쿠의 수장들은 “아지(按司)”라는 새로운 존칭어로 불린다. 오키나와의 유구왕국은 3개의 큰 세력으로 균형을 이루면서 확립되었는데 오키나와의 역사서는 이 시기를 “삼산(三山, 산잔) 시대”라고 적고 있다. 삼산이란 ‘북산(北山), 중산(中山), 남산(南山)을 말한다. 삼산시대는 15세기까지 안정적으로 이어진다(김산호, 2011).
김영만과 감용범(2011)에 따르면 2009년 4월 20일 방영된 KBS 역사추적 다큐멘터리(KBS1 TV, 2010.09.12)에서도 고려 시대의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전멸한 것이 아니라 오키나와로 피신하여 명맥을 이어갔다는 가설을 방영했다. 그리고 이케다 요시후미 교수는
1,200년대 후반에 오키나와 사회는 큰 변화로서 각지에 성을 축조하여 점차로 류큐왕국으로 묶이는 움직임이 발생하게 되는데 다양한 외부 사람들이 많이 건너오면서 이 변화가 일어난 것이며 특히 삼별초 사람들이 오키나와 사회변동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말한다(김영만․김용범, 2011).
또한 김산호(2011)는 일본 학자들이 고문헌을 참조하여 오키나와 주민들의 혈족 계통을 연구한 결과를 지적하는데, 이에 따르면 오키나와 남자 주민의 Y-염색체가 한반도에서 형성된 한국인 특유의 Y-염색체(O2b1a)와 대부분 동일하고, 인근 대만 등의 원주민 염색체와는 판이하다는 사실이 분명하여 오키나와는 예부터 한국인의 개척으로 이루어진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다음의 결론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오키나와 문화와 언어는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할 정도로 유사하며, 동시에 오키나와인들의 혈족계통 역시 한국인들에 가까우므로 오키나와 주민들 및 그 문화는 한국인 및 한국문화의 유입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 문화 속에서 발달한 가라테는 그 기원에 있어서 한국의 무예, 즉 고려시대의 수박(手搏)에서 시작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오키나와 가라데
먼저 가라테가 한국의 무예에서 기원하였다는 점은 “가라테”라는 이름에서도 확인된다. “가라테”라는 명칭은 한자로 “당수(唐手)” 또는 “공수(空手)”라고 쓴다. 하지만 당수(唐手)와 공수(空手) 중에서 가라테의 원래 글자는 ‘공수(空手)’가 아닌 ‘당수(唐手)’이다. 2차 대전 직전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가라테”를 표시하는 한자어 “당수(唐手)”에 ‘당(唐)’자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여 발음이 같은 ‘공(空)’자로 바꾸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맨손무예인 가라테가 발생한 곳으로 알려진 오키나와[沖縄, Okinawa]는 일본열도의 남쪽에 있는 40개의 유인도와 수많은 무인도로 이루어진 섬나라였다. 오키나와를 “유구”왕국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은 중국이나 조선(朝鮮) 등의 외국에서 오키나와를 부르는 명칭이었을 뿐이며, 오키나와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리는 고유 명칭은 “오키나와”나 “우치나”였다(김산호, 2011).
▲오키나와 지도
“가라테(唐手)”의 한자 이름 때문에 이 무술이 당(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이런 생각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첫째, 그 이름에 들어있는 “당(唐)”자의 당나라가 가라테의 전신인 오키나와 데가 발생했다고 추정되는 시기와 너무나 큰 시간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 특히 조선 시대 이후 한국과 일본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문물들에 대해서 ‘당’(唐)자를 붙이는 사례는 상당히 드문 일이다.
셋째, 가라테의 ‘가라(唐)’자는 당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나라(한국)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넷째, 한국에서 유래된 문화에 ‘당(唐)’자를 붙이는 관례는 일본 조정이 가라(韓國)을 극도로 혐오하기 시작하여 생겨났다(이창후, 2003).
한편 가라테가 한국에서 전래된 무예라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다양한 오키나와의 민속문화들이 모두 한국의 민속문화와 폭넓은 일치를 보여준다. 오키나와에서는 고추를 고려초(高麗草)라 하고, 널뛰기․석전(石戰)․씨름 등을 고려희(高麗戱)라 한다. 청나라의 주황(周煌)이 쓴 ≪유구국기략(琉球國記略)≫에 유구의 여인들이 널빤지 위에서 판무(板舞)를 한다고 했으니, 이는 조선 여자들의 도판희(널뛰기)와 같다. 여기서 중국인들이 널뛰기를 이처럼 어렵게 표현하는 이유는 여인들의 널뛰기가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놀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의 소싸움 진행 방식도 우리와 똑같고 응원할 때 쓰는 기의 깃봉에 태극무늬를 그려 넣는 것도 똑같다. 오키나와의 씨름 방식도 한국처럼 샅바를 잡고 한다(김산호, 2011). 오키나와의 돼지고기 먹는 방법은 한국의 제주도와 똑같다. 제주도의 전통적인 조리법엔 돼지고기를 굽는 경우가 드물고 거의 삶아서 먹는데, 오키나와도 이 방법을 따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돼지를 사육하는 방법도 뒷간과 돼지우리를 연결해 놓은 소위 제주도 똥돼지 사육법과 똑같다(김산호, 2011)
▲김준군의 풍속화 상원도판 속 조선시대 널뛰기 모습
▲오키나와 스모(씨름)
▲한국 씨름(사진출처:씨름협회)
둘째로 오키나와의 언어도 한국어와 비슷하다. 오키나와에서는 한국어 아버지를 ‘아부지’, 어머니를 ‘암마’, 할머니는 ‘할메’ 혹은 ‘하아메’라고 부른다. 또 사탕은 ‘사아따아’, 대개는 ‘데에게에’, 맛있다는 ‘마아세에따', 오이는 ’우이‘, 동지는 ’도웅지‘, 심지어 북한식 욕설인 ’쌍간나‘는 ’산가나‘라고 하며(김산호, 2011), 또한 ‘왕’을 ‘사또’, ‘오이’를 ‘우이’라 하며, ‘동지(冬至)’를 일본어의 ‘도오지’나 중국어의 ‘똥쯔’보다는 우리말에 가까운 ‘도웅지’라고 발음하고, 무게의 단위인 관(貫)을 ‘관’이라 하여 일본어 ‘깐’과는 다르지만 우리말과는 유사한 등, 끝이 없이 많은 예가 있다(허인욱, 2005).
그렇다면 한반도의 무예가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오키나와에 전파되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고려 말에 원나라의 침입에 무너진 고려에 반대하여 원종 11년(1270) 6월 초하루에 장군 배중손, 야별초 지유 노영희 등의 지휘로 삼별초군이 몽골에 항거해 봉기하였다. 처음에 삼별초는 강화도에 지배권을 확보하고 반몽(反蒙) 정부를 세웠으나, 1271년 몽골군 총사령관 흔도(忻都)와 김방경이 이끄는 여몽 연합군에 밀려서 강화도를 버리고 진도로 물러났고, 뒤이어 제주도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도 절대적인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키나와로 피신하였다(김산호, 2011). 김산호(2011)에 따르면 오키나와에서 삼별초는 방어를 위한 군성인 구스쿠를 세우고 오키나와 왕국을 건설한다(김산호, 2011). 당시의 슈리성(首里城)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1982년 대량의 고려기와가 출토됨으로써 이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김용만․김용범, 2011).
▲배중손 장군 동상(전라남도 진회군 임회면 굴포리)
더 이상 몽골과 고려관군의 위협이 없게 되자, 삼별초 지도부는 더 이상 집단적으로 뭉쳐서 섬을 방어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게 되고 섬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서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각 구수쿠의 수장들은 “아지(按司)”라는 새로운 존칭어로 불린다. 오키나와의 유구왕국은 3개의 큰 세력으로 균형을 이루면서 확립되었는데 오키나와의 역사서는 이 시기를 “삼산(三山, 산잔) 시대”라고 적고 있다. 삼산이란 ‘북산(北山), 중산(中山), 남산(南山)을 말한다. 삼산시대는 15세기까지 안정적으로 이어진다(김산호, 2011).
김영만과 감용범(2011)에 따르면 2009년 4월 20일 방영된 KBS 역사추적 다큐멘터리(KBS1 TV, 2010.09.12)에서도 고려 시대의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전멸한 것이 아니라 오키나와로 피신하여 명맥을 이어갔다는 가설을 방영했다. 그리고 이케다 요시후미 교수는
1,200년대 후반에 오키나와 사회는 큰 변화로서 각지에 성을 축조하여 점차로 류큐왕국으로 묶이는 움직임이 발생하게 되는데 다양한 외부 사람들이 많이 건너오면서 이 변화가 일어난 것이며 특히 삼별초 사람들이 오키나와 사회변동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말한다(김영만․김용범, 2011).
또한 김산호(2011)는 일본 학자들이 고문헌을 참조하여 오키나와 주민들의 혈족 계통을 연구한 결과를 지적하는데, 이에 따르면 오키나와 남자 주민의 Y-염색체가 한반도에서 형성된 한국인 특유의 Y-염색체(O2b1a)와 대부분 동일하고, 인근 대만 등의 원주민 염색체와는 판이하다는 사실이 분명하여 오키나와는 예부터 한국인의 개척으로 이루어진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다음의 결론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오키나와 문화와 언어는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할 정도로 유사하며, 동시에 오키나와인들의 혈족계통 역시 한국인들에 가까우므로 오키나와 주민들 및 그 문화는 한국인 및 한국문화의 유입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 문화 속에서 발달한 가라테는 그 기원에 있어서 한국의 무예, 즉 고려시대의 수박(手搏)에서 시작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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